[이혁 전 주베트남 대사] 차기 대통령, 초당적 실용외교로 국민통합 이끌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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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차기 대통령을 선출하는 조기 대선의 대진표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제1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이재명 전 대표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고, 국민의힘은 내일 전당대회에서 확정할 예정이다. 다음 달 3일 대선을 치르면 탄핵 정국이 불러온 국내 정치의 불확실성은 어느 정도 해소된다. 하지만 정권 인수위원회 없이 시작하는 차기 정부는 격변의 국제 정세와 맞서야 한다. 출범 100일을 넘긴 트럼프 행정부의 과격하고 현상 파괴적인 외교 안보와 경제 정책으로 인해 국제사회는 그야말로 대혼돈의 세계다. 상궤를 벗어난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중재, 글로벌 군사 관여 축소 움직임, 과도한 관세 부과 등 미국이 보여주는 새로운 국제 질서는 불안감 투성이다. 집단 안보와 규범에 입각한 국제 질서, 자유무역주의, 민주주의 확산 등 미국이 전통적으로 견지해 온 가치와 원칙들이 복원될지 예측하기도 어렵다.
그렇지 않아도 ‘피크 코리아(Peak Korea)’로 표현되는 우리 경제에 대한 비관론이 대두하고 있는 가운데 선진 경제와 민주주의를 달성한 한국의 전략적 가치가 상승하느냐 아니면 추락하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새 대통령은 한국의 흥과 망을 좌우할 엄중한 역사적 사명을 짊어질 수밖에 없다.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려면
정상외교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상황에서 새 대통령은 당장 6월 말에 열리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담을 비롯해 반년 가까이 공백이었던 다양한 정상외교를 챙겨야 한다. 11월에는 경주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도 주관해야 한다. 또 한국 경제의 사활이 걸린 한·미 관세 협상도 발등의 불이다. 트럼프의 귀환으로 기존의 규범과 가치보다 ‘힘의 게임’으로 전개되고 있는 국제 질서 속에서 친미, 친중, 친일이나 따지는 당파적인 명분론으로 허비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국내외 일정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칙을 바로 세우고 국익을 가장 앞세워야 한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처럼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다. 엄중한 환경을 맞이하는 차기 대통령은 당리당략을 떠나 최소한 외교와 안보만큼은 야당과의 이견을 좁히는 데 솔선하고, 초당적 외교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과거 정부에서 결정된 외교 정책이라도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이어받아야 한다. 또 대통령은 민감하고 중요한 외교 이슈에 관해 국민에게 직접 설명하고, 이해와 지지를 구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이는 대통령이 아니면 누구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원칙을 토대로 정교한 4강 외교, 특히 한·미 동맹 관리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미·중 전략 경쟁의 격화, 중국의 위협적 기술력과 군사력 증대, 일본의 방위비 증대 및 보수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북·러 군사협력 등 복잡한 상황들은 한국 외교에 전례 없이 어려운 도전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일수록 한·미동맹을 소중히 관리해야 할 필요성은 오히려 커졌다. 현재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해 한·미동맹을 대체할 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차기 정부는 인내와 끈질긴 자세로 미국을 설득하는 작업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올해 수교 60주년을 맞는 한·일 관계에 불안요인들도 잠재해 있다. 징용자 배상 문제 해결로 양국 관계가 다소 개선됐지만 잠재된 과거사 이슈들도 적지 않다. 과거사 이슈에 대해서는 분명하고 엄정하게 대응하되 다른 분야와 분리해 미래를 향한 교류를 본격화해야 할 시점이다. 더구나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와 중국의 국제적 영향력 증대 노력에 대응하여 유사한 지정학적 환경에 있는 한국과 일본은 협력의 폭을 넓혀야 한다. 한·일 관계가 우호적이어야 한·미 동맹과 한·미·일 협력이 더욱 강화될 수 있다. 이는 안정된 한·중 관계를 추진하는 데 있어서도 큰 자산이 될 것이다.
한·중, 한·러 관계 관리의 중요성
가장 난제는 중국과의 관계다.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과의 대결에 집중하고 있다. 그간 한국은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안미경중’ 정책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가 경제를 앞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운신의 폭이 그리 넓지 않다. 어쩌면 미·중 양측으로부터 한쪽을 선택하라는 강요를 받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중국은 한·미·일 협력 체제를 견제하기 위해 한국,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을 증대하려는 눈치다. 중국의 세계적 위상, 지정학적 위치, 한·중 경제통상관계, 북한에 대한 영향력 등을 감안할 때 한·중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할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한·중·일 정상회의 등을 매개로 한 3국간 협력이 이 지역 정세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는 동북아의 안정과 평화를 지키기 위한 한·미 동맹 및 한·미·일 협력의 목표와 모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북한의 참전으로 한·러 관계가 다소 소원해진 게 사실이다. 그러나 러시아를 불량 국가로 취급하며 관계 회복을 소홀히 하는 것은 제 발등 찍기다. 특히 북한과 러시아의 군사 협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러시아와의 소통과 협의를 해나가는 것이 우리 안보를 위해 필요하다.
대한제국 시대 때 고종의 아관파천을 비롯해 옛소련과 러시아는 한반도의 운명과 깊이 관련되어 온 존재임을 유념하면서 현실의 제약 속에서도 한·러 관계의 점진적 회복에 노력해야 한다.
4강 외교뿐 아니라 그간 경제 교류에 치중해 왔던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 유럽연합(EU), 인도, 글로벌 사우스(남반구 신흥 개발국) 등과의 관계도 외교 전략적 분야로 지평을 확대해야 한다. 외풍은 거센데 과제는 산적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차기 대통령이 외교를 이념으로 접근하는 자세는 금기사항이다. 각 당의 대선 후보 입장에선 한 표라도 더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정녕 국가와 국민을 생각한다면 정권 출범 직후부터 몰아칠 외풍에 지금부터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초당적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국익을 앞세우는 외교를 누가 외면하겠나. 올바른 외교는 분열된 우리 사회를 통합할 수 있다.
이혁의 전 주베트남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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