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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멜로에서 호러로, ‘국제규범 전성시대’ 시즌 2

By 한반도평화만들기    - 26-06-29 10:36    2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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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어떻게 되나요?” “국제법은 어디 있나요?” 학교에서 국제법을 가르친다 하면 요즘 어디서든 듣는 질문이다. 때론 법학자가 아니라 미래학자가 된 기분이다. 국제질서가 요동치고 있다. 세계 곳곳, 이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이 연신 일어난다. 국제사회의 냉혹함이 적나라하다. 이런 큰 일에 뭔가 분주히 움직여야 할 유엔은 어디에 있나. 돈도 없어 운영을 줄인다는 소식만 들린다. 


맞다. 국제규범이 제대로 지켜졌다면 이 지경에 이르진 않았을 것이다. 이곳저곳 실망감이 가득하다. 심적 충격에 등급을 매긴다면 규범 준수 모범국인 우리나라가 제일 위쪽일 것이다. 그런데 실망감을 잠시 접고 좀 더 자세히 볼 필요는 있다. 여기도 물밑 빙하가 있다.

해외 여행을 많이 한다. 대략 전 세계 매일 4만편의 국제노선이 5백만명을 1200개 공항으로 실어 나른다. 대부분 제시간에 출발하고 도착한다. 당연히 이들은 보도되지 않는다. 행여 불행한 사고가 발생한 경우만 언론에 나온다. 국제법 논의도 비슷하다. 드라마틱한 위반 사례만 보도되고 뇌리에 남는다. 일종의 착시효과가 있다.

해서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대부분의 국제법은 지금도 물밑에서 부지런히 움직인다. 최근 국제투자소송에서 연이어 우리 손을 들어준 것도, 캄보디아에 우리 국민 보호를 따지는 것도 국제법의 작동이다. 중국과 서해 경계선 획정도, 일본과 공급망 협력도, 쿠팡에 우리 법 적용도 마찬가지다. 외국 관광지와 서울 거리를 서로 오가며 활보하는 것도 그러하다. 지난해 관세 대란에도 사상 최고 7097억달러 수출에 이른 것도 그 소산이다. 미국을 뺀 전 세계 교역 85%는 여전히 물밑에서 룰대로 움직였다.

일상에서 방 하나 빌려도 계약서로 마무리한다. 국가간 문제는 말할 나위 없다. 싫든 좋든 결국 마지막엔 문서로 정리되고 규범으로 등록된다. 갈등의 끝판인 전쟁도 돌고 돌아 마무리는 종전협정, 평화협정이란 ‘조약’이다. 국제규범에 대한 이런 물밑 빙하, 그 보이지 않는 부분을 흔히 놓치곤 한다. 기막힌 일 뒤 묵묵히 돌아가는 일상은 국제사회도 마찬가지다. 혼란 속에도 톱니바퀴는 돌아간다. 이런 “물밑 현상”을 봐야 국제법에 대한 냉정한 평가도 가능하다.

분명 한 축이 무너졌다. 그러나 황망한 마음에 모든 게 뒤집힌 ‘무법의 정글’로 보는 건 성급하다.

이에 더해 더 중요한 건 새로운 흐름이다. 국제규범의 ‘도구화’ 현상이다. 일명 “법률전쟁(lawfare)”이라 불리는 국가간 다툼이다. 요컨대 전략적 목표를 위해 국제규범을 동원, 활용하는 움직임이다. 때론 남용, 오용에 이른다. 결코 올바른 흐름이라 할 수 없다. 이 움직임은 새 영역에도 활발하다. 규범 ‘맞춤형 제작’이랄까. 공급망, 반도체, 인공지능, 북극, 우주에서 새로운 룰을 둘러싸고 지금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배경이다. 국제법이 도구라는 명제에 동의하진 않지만 지금 ‘도구적’으로 활용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간 우리는 늘 “규범 기반” 국제질서를 역설했다. 이게 지금 “규범 이용” 국제질서로 바뀌고 있다. “규범” 이름을 같이 달지만 전자가 멜로물이라면 후자는 호러물이다. 감독, 배우는 같아도 장르가 다르다. 안타깝지만 냉혹한 현실이다. 멜로든 호러든 피할 방법이 딱히 없다. 우리도 자연스레 그 영화의 일부인 까닭이다. 주연이냐, 조연이냐, 엑스트라냐 차이일 뿐이다. 오히려 모두 웃으며 달달하게 끝나는 멜로물보다 폭력과 갈등이 이어지는 호러물에서 ‘도구’로서 규범은 더 중요해졌다. 아니 더 무서워졌다.

참 아이러니다. ‘도구화 현상’은 외려 여러 국가에서 국제법에 대한 니즈를 높이고 있다. 나쁜 방향으로 향하곤 있지만 쓰임새는 커진다고 할까. 이에 맞춰 다른 나라들은 이 분야 인력도, 보고서도, 행사도 늘리고 있다. 학계와 정부기관이 다양한 협업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법률전을 위한 빌드업이다. 국제법이 대견해서가 아니다. 철저한 계산과 목적이 깔려 있다. 다른 의미로 ‘국제규범 전성시대’가 다가오는 듯하다. 시즌 2인가.

그런데 우리는 이런 전략적 접근이 여전히 부족하다. 국제법 하면 이상주의의 정신승리 문서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안타깝다. 이제 좀 더 현실적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자. 필요하다면 다른 나라의 도구화 전략에 우리나라도 적극 맞서야 한다. 사악한 창으로 쓰자는 게 아니다. 최소한 소박한 방패로는 필요하다. 방패도 오랜 준비 작업과 계획이 있어야 가능하다.

국제정세가 소용돌이친다. 혼란 속 이제 규범과 상관없는 국제질서가 들어온다고 믿는 건 섣부르다. 실망감에 국제규범을 백안시하는 건 더 위험하다. 비판은 세게 하더라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전략적 시각에서 짚어보자. “테이블에 앉지 않으면 메뉴가 된다.” 지난 1월 다보스 포럼에서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의 연설이다. 여기서 좌석 배치표, 음식 레시피가 바로 국제규범이다. 호러 장르 시즌 2에 꼭 맞는 말이다.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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