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관 외교부 장관] 글로벌 외교냐, 로컬 외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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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위상이 글로벌 국제무대에서 놀라보게 높아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6월 G7 정상회담 계기에 이재명 대통령에게 “미국 군함 10척을 빠르게 건조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한국 조선업의 지원과 협력이 미국에게 절박한 상황이 된 것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세계 HBM 시장 점유율의 약 80% 이상을 차지하는데, 이들로부터 반도체를 사겠다고 세계 굴지의 기업들이 줄을 섰다. 두 회사의 투자, 공급 관련 결정이 미국 주가 흐름에 상당한 파장을 미치게 됐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24일 샌프란시스코 방문 당시 ‘한·미 AI 서밋’에서 한국이 세계 첨단기술 생태계에서 “대체 불가능한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이미 조선·반도체·방산·원전 등 분야에서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또한 K컬처의 인기 덕분에 한국인 여행객들은 세계 도처에서 대접받고 있다.
우리의 역량과 국제적 위상은 이처럼 올라갔는데 우리 외교는 과연 그에 걸맞게 글로벌 외교 전략을 가지고 있는가? 아쉽게도 아직도 로컬 외교에 머무르고 있는 느낌이다. 예를 들어 지난해 이재명 정부 출범 시 나토 정상회의에 참여 여부 논란이 그랬다. 올해는 참석했지만, 지난해에는 강한 반대 의견으로 불참했다. 반대론자들의 주장은 우리 정상이 나토 회의에 참석하면 러시아와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시각은 명분과 실리, 두 가지를 모두 놓치게 만든다. 명분 관점에서 볼 때 우리 국민 대다수는 아직도 국가들 간에 규범이 지켜져야 된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영토주권 존중이라는 유엔 헌장의 기본 정신을 정면으로 위반하면서 북한에 대해서는 파병 대가로 군사기술을 이전해 주고 있는 러시아에 비판적이다. 그러한 러시아의 행동에 대해서 침묵하고 심기를 살피는 자세는 국제무대에서 한국을 명분과 가치는 신경 안 쓰고 돈만 벌려 하는 상인 국가로 인식시키고 다수 서방 국가들 사이에서 우리의 입지를 좁힐 것이다. 실리 관점에서도 러시아와 잘 지내야 전후 복구 등 사업에 한국이 참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유럽연합(EU)의 경제 규모가 러시아 경제의 9배이고 우리의 대EU 교역액이 대러시아 교역액의 수배, 수십배 크다는 현실을 무시하고 스스로 손해를 자초하는 계산법이다.
최근에 만난 유럽의 외교관들은 한국이 유럽 국가들의 고민과 가치를 충분히 공유하지 않은 채 무기 판매에만 몰두하는 국가라는 인식을 내비쳤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면 유럽 국가들은 앞으로 점차 한국보다 비싸고 조건이 나빠도 유럽 내부로 생산과 조달을 돌릴 것이다. 방산 협력은 판매국과 구매국 간의 가치 공유와 신뢰가 깔려 있다. 믿지 못할 국가에게 자국의 무기 생산을 맡길 나라는 없다.
중국에 대해 어떤 스탠스를 취하느냐 문제도 비슷하다. 출범 이후 이재명 정부가 한·미 관계를 잘 가져가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워싱턴의 트럼프 대통령 주변에는 아직도 의심의 눈길이 존재한다. 현 정부가 속내로는 이전 진보 정부 때처럼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추구하려 한다는 것이다. ‘균형 외교’는 한·미 간에 마스가 프로젝트가 보여주듯 양국이 이미 안보·경제·기술과 관련해서 얽히고설켜 한 몸이 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따라잡지 못하는 발상법이다. 이제 우리 외교도 국내정치적 진영 논리를 벗어나 좀 더 판을 크게 보고 전략적으로 임해야 한다.
대미 투자 이행도 어떤 억울한 연유가 있었든, 일단 약속했으면 서두르는 것이 우리에게 이득이 될 것이다. 11월 중간선거 이후 미국은 대단히 혼란스러운 정국에 빠져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트럼프 행정부가 약속한 원자력협정 개정이나 핵추진잠수함 건조 관련 협력도 지지부진해질 가능성이 상당하다.
우리 국민이 지지하는 민주주의와 규범 기반 국제질서라는 가치와 지향성을 좀 더 분명히 하면서 외교를 해야 ‘실용 외교’도 결실을 거둘 수 있게 되어버렸다. 앞서 말한 대로 한국의 국제적 위상과 기대가 훨씬 커져서 주목받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및 중국에게도 필요할 때 할 말은 해야 한다. 국내 정치적 진영 논리의 시각에서 중·러, 미·일과의 관계 간에 균형을 맞추려는 사고도 지양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잘하는 조선·반도체·방산·원전 등 모든 분야의 미국과 유럽 등 서방 국가들과 교류에서 갈수록 더 큰 손해를 볼 것이다. G7이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도 힘들어질 것이다.
한 달 전 독일의 공영방송 DW는 일본이 인도·태평양 지역의 가장 신뢰받는 국가가 되고 있다고 찬사를 보냈다. 일본이 미국과의 동맹은 최선을 다해 유지하고, 세계 도처의 전략적 중요 국가들과는 전방위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규범 기반 국제질서 수호의 리더국가로 조용히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 앞에 두 가지 길이 놓여 있다. 글로벌 수준으로 커져 버린 국력과 위상에 걸맞게 가치적 지향점을 갖춘 서방세계 중심의 글로벌 외교를 펼쳐나갈 것인가, 아니면 글로벌 표준 대신 국내 정치 진영 논리에 따라 주변 4국과 북한에 몰두하는 협소한 로컬 외교를 계속해 나갈 것인가.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지 정치권과 국민이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때다.
윤영관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 전 외교통상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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