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경 칼럼] 헌법정신을 파괴하는 간신배의 요설
본문
1948년 헌법이 제정된 이후 아홉 번의 개헌(改憲)이 있었다. 여섯 번은 “나 아니면 안 된다”고 오판한 권력자가 집권 연장을 위해 시동을 걸었다. 시대착오적 불멸의 꿈은 지상에 평지풍파를 일으켰고, 민주주의가 파괴됐다. 저 범부(凡夫)의 일상까지 무너졌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1952년 전쟁 중에, 그것도 피란지에서 재선(再選)을 위한 최초의 개헌을 했다. 대통령 선출 방식을 국회 간선제에서 국민 직선제로 바꿨다.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야당 의원들을 감금한 뒤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단 한 사람의 야망을 위해서였다. 두 해 뒤에는 중임(重任) 제한을 없애기 위해 사사오입(四捨五入)이라는 기상천외한 산술(算術)을 적용한 두 번째 개헌에 성공했다. 영구집권의 길을 열었지만 분노한 민심은 4·19혁명으로 폭발해 ‘국부(國父)’를 심판했다. 총칼로 권력을 쓸어담은 박정희는 1969년 대통령 3선을 허용하는 개헌안을 심야에 날치기 통과시켰다. 3년 뒤에는 야만적인 유신헌법으로 민주주의를 격살(擊殺)한 뒤 스스로를 무소불위의 ‘황제’로 격상시켰다. 1979년 10월 26일 타락한 ‘산업화의 영웅’을 겨냥한 궁정동의 총성은 이때부터 예정된 미래였다.
민주당의 뚜렷한 역사적 공로는 장기독재를 끝내고 민주화를 쟁취한 일이다. 그런데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민주당 출신 국회의장이 장기집권이라는 지옥의 문을 열어버린 것이다. 조정식 의장은 “현직 대통령의 연임 개헌은 주권자인 국민 여론과 국민의 선택 문제”라고 했다. 그는 7월 28일 취임 후 첫 기자간담회를 앞두고 미리 질문을 받아서 예행연습까지 했다고 한다.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헌법정신을 살해하는 고의적인 도발이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대통령 정무특보 출신으로 국회의장이 된 그가 보은(報恩)을 위해 아부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전에도 “(현직 대통령의 4년 연임제 개헌 적용 여부는) 결국 국민이 결단할 문제”(2025년 10월 24일 조원철 법제처장), “요새는 사람들이 ‘5년이 너무 짧다’고 한다. ‘더 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분들도 있다.”(2025년 12월 20일 김민석 국무총리)는 아슬아슬한 발언이 있었다. 하지만 개헌의 총대를 멘 입법부 수장의 계산된 발언은 차원을 달리하는 날카로운 비수였다.
범민주 진영은 국회의장의 ‘요설(妖說)’에 경기(驚氣)를 일으키고 있다. 박정희 장기독재에 반대하다 사형선고를 받았던 유인태 전 의원은 “잘못한 거지. 정말 또 욕 나오려고 그러네”라고 했다.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이 조항은 온갖 헌정 파괴의 교훈을 담아 1987년 주권자가 피와 땀과 눈물로 쟁취해낸 것”이라며 “덕분에 장기집권의 불안을 덜고 여야 간 정권 교체의 가능성도 열렸고, 민주 헌정의 정착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고 했다. 그는 “간신배의 소리”라며 “한 번 더 그런 헌법파괴적 소리를 하면 국회의장부터 끌어내리려고 여의도에 모여들 것”이라고 일갈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김대중이라는 위대한 이정표를 항상 가슴에 품고 나아가겠다”고 했다. 김대중은 어떤 사람인가. 박정희의 3선을 저지하기 위해 1971년 신민당 대선후보로 나서 “이번에 막지 못하면 영구집권의 총통제가 실시될 것”이라고 했다. 예언은 현실이 됐다. 박정희는 유신 친위쿠데타를 일으켰고, 중앙정보부는 영구집권을 반대한 김대중을 납치해 산 채로 동해바다에 수장(水葬)하려고 했다. 김대중은 짓밟힌 민주주의를 살리기 위해 독재자 박정희에게 맞서 저항하는 순교자의 길을 선택했다.
간신배는 지금 대통령을 시험하고, 모독하고 있다. 김대중을 존경한다는 현직 대통령이 연임하려고 헌법을 걸레로 만든다면 세계가 비웃을 것이다. 호사가들은 8개 사건으로 5개 재판이 중지된 대통령을 위한 공소취소가 어려워지자 연임 개헌이 검토되고 있다고 수군거린다.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밤잠을 못 이루며 버거운 국정과제와 씨름하고 있는 대통령을 교란하고, 국민 불신을 유발하는 저급한 이간계(離間計)일 것이다. 김대중의 민주주의를 품은 이 대통령이 이승만·박정희의 함정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불온한 루머를 잠재우려면 대통령이 “연임 개헌은 야당이 반대해서 불가능하다”고만 해선 안 된다. “연임할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다”고 딱부러지게 정리해야 한다. 빠를수록 좋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