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동 서울대 교수] 알려지지 않은 미래를 향한 옵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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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가을, 토론토대 제프리 힌턴 교수와 대학원생 두 명이 이미지 인식 대회에 프로그램 하나를 냈다. 훈련에 쓴 장비는 게임용 그래픽카드 두 장이었다. 결과는 압도적이었다. 그날을 계기로 인공지능의 하드웨어 중심이 GPU로 옮겨갔다. 게임 화면을 그리려고 만든 칩이 인공지능의 핵심 인프라가 되었고, 엔비디아는 세계 최고 몸값의 기업이 되었다.
2017년에는 구글 연구자 여덟 명이 ‘필요한 것은 어텐션뿐’이라는 논문을 냈다. 출발은 기계번역이었지만, 그 논문이 제안한 트랜스포머 알고리즘 위에 오늘날의 거대언어모형이 올라섰다.
인공지능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로켓 추진체를 다시 착륙시켜 쓰자는 발상은 오래도록 무모하게 여겨졌지만 이제 우주산업의 규칙이 되었다. 배터리에서도 액체 전해질을 없앤 전고체, 리튬 대신 나트륨을 쓰는 전지가 다음을 다툰다. 당대의 상식을 의심한 자리에서 미래의 지도가 펼쳐졌다. 오늘의 왕좌는 어제의 변방이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트랜스포머와 GPU는 이제 다시 상식이 되었다. 상식이 되면 생태계가 따라붙는다. 반도체 설계도, 데이터센터도, 전력망도, 투자계획도, 대학 교과과정도 그 상식 위에 짜인다. 물속의 물고기가 물을 의식하지 못하듯, 상식은 상식이어서 오히려 보이지 않는다. 길을 열어주는 동시에 다른 길을 지운다.
19세기 세계를 지배하던 천연얼음 업계는 인공얼음이 나오자 얼음을 더 잘 자르는 증기톱, 더 오래 보관하는 기술에 전력을 쏟았다. 무능해서 무너진 것이 아니다. 알려진 미래에서 더 열심히 했을 뿐이다.
지금 인공지능 시대를 지배하는 상식도 끝없이 계속될 수는 없다. 세계 데이터센터의 전력소비는 2024년 415테라와트시에서 2030년 945테라와트시로 두 배를 넘고, 2035년에는 1200테라와트시를 웃돌 것이다. 일본 전체가 한 해 쓰는 전기보다 많다. 이 비용을 생각하면 지금의 로드맵이 지속가능한 답일 수 없다. 그런데도 모두가 같은 길로 달린다. 그것이 상식의 힘이고 무서움이다.
대체불가능한 기술은 이미 만들어진 판에서는 얻기 어렵다. 게임의 규칙을 남이 만들었으니 우리는 그것을 가장 잘 지키는 우등생이 될 뿐이다. 대체불가능은 판이 새로 짜일 때 생긴다. 그때 고유한 조각을 쥔 나라가 초대장을 받는다. 그런데 다음 판이 무엇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남이 제시한 키워드로 미래를 맞히려 하기보다 여러 가능성을 시험해 미래의 옵션을 늘려야 한다.
얼마 전 한 과학고의 ‘그랜드퀘스트’ 발표회에 초대받았다. 2년 넘게 교과서와 상식 너머를 상상하도록 격려해온 프로그램이었다. 쉽게 답이 나올 리 없는 질문들이었다. 학생들은 답 없는 문제를 스스로 던지고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이 상상한 미래를 설명하는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오랫동안 한국 산업과 기술의 내일을 걱정해왔지만, 그날은 모처럼 마음이 밝아졌다. 추격의 기억에서 자유로운 세대가 다음 판을 상상하고 있었다.
이것이 한 과학고만의 이야기여서는 안된다. 연구실과 기술경쟁의 현장에도 같은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교과서 다음, 상식 다음을 묻도록 권하고 지원해야 한다. 로드맵 상의 문제를 잘 푸는 것만으로는 새로운 질문을 내기 어렵다. 질문을 던져본 적 없는 나라는 판이 바뀔 때 늘 뒤에 선다.
마침 정부가 반도체 호황에 따른 추가세수로 미래대응기금을 추진하고 있다. 청년과 성장동력, 지방과 교육·인재에 투자하겠다고 한다. 다 필요한 일이다. 여기에 하나를 더하자. 우리는 도전적 연구를 말할 때도 흔히 알려진 문제의 난이도를 높이는데 주목한다. 알려진 산을 더 높이, 더 빨리 오르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지형 자체를 바꾸고, 로드맵 자체를 새로 그리려는 도전이다. 중요한 것은 액수보다 성격이다. 기금의 5%냐 20%냐보다 어떤 5%인가가 중요하다.
기금 안에 그런 창구를 두면 어떨까. 로드맵에 없다는 것이 탈락 사유가 아니라 오히려 지원할 이유가 되는 창구다. 성공 가능성을 설명하기 어려운 질문을 시험하고, 실패해도 경험과 데이터를 다음 도전자에게 넘기는 돈이다.
계획에 없는 것을 지원하는 문이 하나도 없는 나라는 계획에 없던 미래를 맞을 준비가 없는 나라다. 미래대응기금은 미래의 승자를 알아맞히는 돈이 아니라 미래의 옵션을 늘리는 돈이어야 한다. 알려진 미래에는 기업과 시장의 돈이 몰린다. 국가의 돈이 더 필요한 곳은 아직 이름 없는 미래다.
기술은 도약하지 않는다. 그러나 판은 바뀐다. 판이 바뀌는 자리에는 늘 오래전에 시작된 질문이 있었다. 게임용 칩도, 트랜스포머도, 거꾸로 내려오는 로켓도 그랬다.
발표회 때 만난 학생들의 목소리가 귀에 남아 있다. ‘답이 보이지 않지만, 내가 한번 해보겠다.’ 미래대응기금이 키워야 할 것은 바로 그런 목소리와 태도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래로 갈 수 있는 옵션을 늘리는 것, 그것이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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