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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현 이사장] 이홍구 전 국무총리 추도사

By 한반도평화만들기    - 26-05-11 09:43    7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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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당 이홍구 선생님을 보내드리며〉

오늘 우리는 존경하는 스승이자, 이 나라의 원로인 효당(曉堂) 이홍구 선생님을 보내드리는 먹먹한 슬픔과 허전함 속에서 자리를 함께하고 있습니다. 선생의 아흔 두 성상(星霜)을 되돌아보니 흔들리는 후학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등대의 역할을 하셨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선생은 어질고 겸손한 선비의 인품과 단호한 지사의 풍모를 동시에 갖춘 외유내강의 인격체셨습니다. 저는 20년 이상을 가까이 뵈면서 한번도 화내는 모습을 본 일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도 물론 없었습니다. 온화한 미소와 부드러운 말로 차별없이 사람을 대하는, 부처님의 ‘화안애어(和顔愛語)’를 느끼게 해주셨습니다. 늘 자신을 낮추고 상대의 입장을 먼저 헤아렸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선생은 미국 유학시절인 20대 초반 결핵에 감염돼 30개월 동안 학업을 중단하고 생사를 넘나드는 투병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맹목적인 집착을 내려놓고 세상만사를 너그럽게 대하는 달관의 경지에 도달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선의 명군 성종의 열세번째 아드님인 영산군(寧山郡)의 15대 종손이라는 긍지와 책임감도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서양철학을 섭렵한 정치학자였던 선생은 할 말은 반드시 해야하는 올곧은 지식인이었습니다. 서울대 교수시절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근대화 추진을 명분으로 행정의 효율성을 앞세우며 국회를 경시하고 정치를 희생시키는 이른바 ‘정치의 비정치화’를 추구하고 있다고 날선 비판을 했습니다. 한국사회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한 ‘정치의 회복’을 촉구했습니다. 엄혹한 군사독재 체제에 영합하지 않고 정면으로 비판하는 입장에 섰던 것입니다.

선생은 한국의 지성인이라면 근대화 작업을 추진하되 어떻게든 민주화도 실현시켜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피할 수 없다는 신념을 공개적으로 설파했습니다. 그래서 강원용 목사가 주도한 크리스천아카데미 대화모임에 참여해 인간화, 복지화의 과제를 토론하고 숙고했습니다. 선생은 이 무렵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진행된 산업화는 ‘기계화된 사회’를 낳았고, 그리하여 인간의 죽음이 무감각하게 느껴지는 사회에서는 인간의 삶도 무의미하게 생각될 수 밖에 없다“는 성찰적 명언을 남겼습니다. 예일대 박사 출신 서울대 교수라는 선택받은 엘리트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체제비판적 지식인이었습니다. 유신시대에는 주미대사직을, 5공시절에는 외무부장관직을 제의받았지만 거절한 것도 특유의 비타협적 정신 때문이었습니다.

선생은 1969년 월간 『세대』지에 소개된 연세대 함병춘 교수와의 대담을 통해 ‘시민사회’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에 들어서 널리 쓰이기 시작한 용어였습니다. 영국 경험주의 철학을 논리적으로 완성시킨 데이비드 흄을 깊이 연구했기에, 그가 18세기에 썼던 이 개념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했던 것입니다. 어두운 시대에 새벽을 앞당기기 위해 필설로 고함을 지르는 일류 지성의 사명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선생은 노태우 정부의 통일원 장관으로서 김대중·김영삼·김종필 세 야당 총재의 의견을 반영해서 여야합의에 의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도출해냈습니다. 자주·평화·민주의 3대 원칙을 바탕으로 남북연합 체제를 거쳐 통일된 민주공화국을 완성하자는 모델입니다. 선생은 통일을 지향하고 가슴에 품되 평화공존이 우선이니, 서두르지 말자는 입장을 평생 간직하셨습니다.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선생이 주도한 통합 정신의 찬란한 레거시(legacy)이며, 지금도 우리나라의 공식 통일방안입니다.

당시 세 야당 총재는 이홍구 장관이 면담을 요청하면 당일로 시간을 냈고, 늘 “다른 두 분은 어떤 생각인가요”라고 묻고, 각자의 견해를 조화롭게 피력했다고 합니다. 권력자인 현직 대통령과 개성이 강한 세 야당 총재를 상대로 사소한 잡음도 없이 여야 만장일치의 합의안을 이끌어낸 것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선생이 시중(時中)과 처중(處中), 즉 변화하는 상황을 정확히 읽고 그에 맞는 판단과 실행을 하며, 무리하지 않고 균형을 지키는 태도를 내면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선생은 평소 후학들에게 “정치학은 모든 사람만큼이나 존재한다. 정치학도는 만나는 사람들의 말에 모두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이런 진심어린 경청과 자제, 타협의 마음가짐이 선생에게는 대포가 부럽지 않은 강력한 무기였을 것입니다. 김영삼 정부의 통일부총리로서 김용순 대남담당 비서와의 남북정상회담 준비회담에서도 선생의 능력은 유감없이 발휘됐습니다. 북에 어떤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단 8시간만에 합의를 이끌어낸 것은 지금도 믿기 어려운 성공사례입니다.

14년간 외국인들과 공부하고 이들을 가르치면서 체화된 선생의 일류 국제감각은 우물안 개구리인 범인(凡人)들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김영삼 정부의 국무총리 시절 자신과 김진현 전 과기부장관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세계화추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세계화를 독려했던 것입니다.

선생은 보수인 노태우·김영삼 정부에서 국무총리와 장관·대사, 당 대표를 역임했지만 진보인 김대중 정부의 거듭된 초대 주미대사직 요청을 수락했습니다. IMF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동분서주하면서 클린턴 행정부 인사들을 만나 백방으로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오해와 비난을 감수하고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전력투구했습니다. 여야 모두가 존경의 뜻을 담은 애도 성명을 발표한 것은 선생의 진정어린 애국심을 인정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선생은 우리가 선진국이 됐고, 국민의 역량은 탁월한데 과거 이승만·박정희·김영삼·김대중 같은 출중한 지도자가 나오지 않는 정치 현실을 안타까와 하셨습니다. 그래서 87년 체제의 낡은 유물인 현행 헌법을 내각제를 근간으로 하는 분권형으로 전환하는 개헌을 일관되게 주창하셨습니다. 그래야 평범한 지도자가 선출되더라도 대한민국의 시스템이 재앙으로 이어지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는 반성과 통찰의 결과입니다. 선생의 탁월한 예지력과 통찰은 여러분과 제가 목도한 수차례의 정치적 곡절을 통해서 타당한 것으로 입증되고야 말았습니다.

제가 옥고를 치르고 미국에 갔을 때 주미 대사였던 선생은 워싱턴 대사관저의 사적인 공간에서 따뜻하게 저녁식사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저는 넉넉한 인품과 경륜에 반했습니다. 그래서 공직에서 은퇴하시면 모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생은 이어령 선생과 함께 중앙일보 고문으로 20년 이상 계셨습니다. 서울대학교에서 봉직한 20년보다 더 오랜 세월을 중앙일보에서 보냈고, 학교 분위기와 가장 가까웠고, 행복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저야말로 선생으로 인해서 더없이 행복했습니다. 마음으로 존경하는 스승, 심사(心師)를 병풍처럼 가까이서 모시는 축복을 마음껏 누렸기 때문입니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걸어가는 길 위에는 북극성이 반드시 떠있어야 하는데, 제겐 선생이 그런 빛나는 존재이셨습니다.

효당 이홍구 선생님, 당신은 일제 식민지와 한국전쟁의 악조건 속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마침내 세계적인 지성으로 빛났습니다. 정파와 상관없이 모든 이들로부터 존경받는 국가 원로로서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통합, 한반도평화를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고단한 삶이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당신이 운명처럼 끌어안으셨던 이 모든 간난을 다음 세대의 몫으로 내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천국의 평안과 안식의 복락을 영원토록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다시 한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26년 5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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